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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61년 2월 26일, 독일, 뉘른베르크

사망 정보: 1419년 8월 16일, 체코, 프라하, 프라하-쿤라티체

본명: 라틴어 Wenceslaus, 체코어 Václav

형제자매: 지기스문트, 존 오브 괼리츠, Elisabeth of Bohemia, 안나 체스카 왕녀, Catherine of Bohemia(/Katharina von Luxemburg), Margaret of Bohemia(Queen of Hungary), Margaret of bohemia(Burgravine of nuremberg)

배우자: 소피아 오브 바바리아 (1389년–1419년), 조안나 오브 바바리아 (1370년–1386년)

부모: 카를 4세, Anna von Schweidnitz

- 보헤미아의 통치자이자 로마 제국의 전 황제. 하지만 많은 독설가가 그는 진정한 왕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의 이복형제 지기스문트의 편을 든다. 서기 1361년, 그는 황제 카를 4세와 그의 아내 슈바이트니츠의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장남의 권리로 그의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작 2살에 그는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으며, 15살에는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강력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는데, 선왕이 죽기도 전에 새로운 왕을 왕위에 앉히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으며, 어린 왕은 성인이 될 때까지 제대로 통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후일 왕이자 황제였던 카를이 죽고 나서 벤체슬라스는 정당하게 두 왕좌에 올랐다. 처음에는 잘 통치하는 듯했으나, 형편없는 고문관들과 어리석은 유럽 영토의 통치자들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곧 왕이 처음에 보였던 열의는 사라지고, 술과 사냥에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왕국의 새로운 통치자를 향한 불만은 커졌고, 벤체슬라스는 갈등을 조정하는 대신에, 그로부터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 사태를 해결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아비뇽에 그들만의 교황이 있던 프랑스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크라운도 받으러 가지 않았다. 또한 그는 모라비아의 변경백 영지의 분노를 사서 그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모라비아의 요프스트가 그를 가둬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그의 참된 통치에 대한 무관심은 심해져만 갔고, 많은 귀족이 항의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헝가리를 통치하고 있던 그의 다른 형제 지기스문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낫다고 여긴 귀족 연맹이 벤체슬라스를 왕위에서 끌어내기 위해 결성되었다. 벤체슬라스는 귀족들이 보내는 경고와 협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가 원하는대로 통치, 정확히는 유흥거리에 전념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귀족들이 인내심을 잃고 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영토의 통치를 맡겼던 지기스문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기스문트는 도와주지 않고 벤체슬라스의 성을 빼앗고 그를 가두었다. 지기스문트는 지배권뿐만 아니라 왕위 또한 차지했고, 왕국에 법과 질서가 회복되는 것에 기뻐한 일부 귀족들은 그를 환영했다. 오늘날, 적갈색 여우,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동안, 벤체슬라스 왕은 여전히 지기스문트의 포로로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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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61년 2월 26일, 독일, 뉘른베르크

사망 정보: 1419년 8월 16일, 체코, 프라하, 프라하-쿤라티체

본명: 라틴어 Wenceslaus, 체코어 Václav

형제자매: 지기스문트, 존 오브 괼리츠, Elisabeth of Bohemia, 안나 체스카 왕녀, Catherine of Bohemia(/Katharina von Luxemburg), Margaret of Bohemia(Queen of Hungary), Margaret of bohemia(Burgravine of nuremberg)

배우자: 소피아 오브 바바리아 (1389년–1419년), 조안나 오브 바바리아 (1370년–1386년)

부모: 카를 4세, Anna von Schweidnitz

- 룩셈부르크의 벤체슬라스 4세는 명군 카를 4세의 아들이다. 그는 보헤미아의 왕위를 상속받았으며 독일의 왕위를 선거를 통해 얻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통치 실력을 상속받지는 못했다. 그는 평생 동안 어릴 때부터 통치술을 교육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왕족의 의무를 모르고 질병에 시달리는 나약하고 게으르며 감정기복이 심한 군주로 알려졌다. 그는 사냥과 음주, 창녀와 궁전에서의 쾌락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 보헤미아 땅에서는 그의 친족들(형제 지기스문트와 사촌들, 즉 모라비아 변경백들)과의 전쟁과 갈등이 벌어졌다.

변경백국 전쟁을 촉발한 사건은 벤체슬라스가 주인을 잃은 올로모우츠 대교구의 땅, 귀족들의 소유인 그 땅을 차지한 것이다. 요프스트의 지휘 아래, 모라비아 군주들은 지기스문트에 합류해서 공개적으로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올로모우츠 문제보다는 그동안 선제후들에 의해서 무능과 게으른 통치를 이유로 황제위를 박탈당한 벤체슬라스의 통치의 적법성에 관한 문제였다. 그는 이후에 수많은 양보를 하고 귀족들의 특권, 사실상 통치권을 그들에게 양도하는 수준의 특권을 줌으로써 보헤미아의 왕위도 잃게 되었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그의 게으름은 두 번의, 첫 번째로 1394년에 체코 귀족들에 의한, 두 번째로 1402년에 형제 지기스문트에 의한, 유페 사건을 불러일으켰다(그럼으로써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벤체슬라스는 처음에는 얀 후스와 그의 지지자들의 개혁 요구를 지지했지만, 그 개혁가가 교회에 의해서 화형대에서 타 죽도록 선고받았을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나중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반란(그리고 성공적이지 못한) 후스파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그는 이 사건을 볼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하고 1419년에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형제 헝가리의 지기스문트는 왕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명분을 따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왕위를 위해 싸워야 했고, 왕위를 차지하고 나서도 오래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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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부터 1403년까지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를 침공해 권좌를 얻으려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남아있는 사료는 굉장히 적고 모호하다. 그러나 우린 스칼리체(질버 슈칼리츠, 실버 슈칼리츠)가 1403년 3월 23일 불타 지도상에서 사라졌음은 알고 있다. 지기스문트가 스칼리츠 앞에 세운 공성캠프에서 서명한 서류가 보존되어있는 덕분에 스칼리츠가 불타버린 정확한 시일까지 알 수 있다.

Little is known about the war in 1402 to 1403, when Sigismund invaded Bohemia and tried to seize power, and the records that do exist are fairly vague. However, we do know the fate of Skalice (Silberskalitz, Silver Skalitz) which was burned to the ground on 23 March, 1403. We know the exact date because a document was preserved that Sigismund signed that day in the siege camp.

 

지기스문트가 스칼리츠를 공격의 목표로 택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곳에 은광이 있었고 스칼리츠의 영주가 벤체슬라스 4세의 지지자이자 국왕의 헤트만인 라체크 코빌라(라드직 코빌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벤체슬라스의 자금줄을 끊고 싶어했다.

Sigismund undoubtedly choose Skalitz because silver was mined here and the town was administered by the Royal Hetman, Racek Kobyla, a supporter of the king. Sigismund apparently wanted to disrupt the flow of money going to the Wenceslas.

 

전설에 따르면, 갑자기 불어온 엄청난 폭풍때문에 성을 포위한 적들이 다음 날 아침으로 공격을 미룬 사이에, 성에 숨어있던 코빌라와 그의 백성들은 성에서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폭풍이 불어온 기회를 틈타서 어둠에 몸을 숨기고 근처에 있는 라타이로 달아났다. 아침이 밝아오자 성을 공격한 지기스문트의 군사들이 텅 빈 성에서 찾은 것은 염소 한 마리 뿐이었다. 지기스문트는 마을과 성을 파괴해버렸고 성은 그 뒤로 재건되지 않았다. 오늘날엔 성의 토대만이 남아있다.

According to legend, Kobyla and his people, who were hiding from the attackers in the castle, were able to escape because of a great storm that blew up and forced the besieging army to wait until morning to take the castle. The castle defenders took advantage of the opportunity and under the cover of darkness fled to nearby Rattay. In the morning, the only thing Sigismund's men found in the empty castle was a goat (this is also in the game). Sigismund then razed the town and the castle to the ground and the castle was never rebuilt. Today, only the foundations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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