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둘러싸인 거주지가 등장한 지 거의 500년이 흘렀고, 이는 나중에 즐리칸족 땅의 경계와 주요 무역로를 보호하는 성으로 발달했으며, 더 나중에는 소도시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150년 전, 이 성은 잿더미가 되었으며, 쿠트나호라나 프라하조차 부럽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벽을 가진 더 아름다운 형태로 새롭게 지어졌다.
라타이의 강화된 소도시는 왕의 지배 아래에 놓였으며, 영지로 인정을 받았다. 룩셈부르크의 요한의 집권 동안 라타이는 리파의 헨리가 통치했으며, 그는 그들이 퍼크스타인이라고 부르던 아래쪽 성을 지었다. 오늘날 라타이는 리파의 케이폰 영주가 성인이 되어서 모든 소도시와 그것들을 둘러싼 토지를 영지로서 물려받을 때까지 하누쉬의 관리 아래에 놓여있다.
라타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소매상인들(도살업자, 대장장이, 재단사, 직공, 갑옷장인)이 활동하며 매달 큰 시장이 열린다. 라타이는 행정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을 직접 고용할 수가 있으며, 강력한 지방 자치 수비대를 지원하고 있다. 라타이의 커다란 석재 교회는 성 마태오에게 봉헌되었다.
Nigh five hundred years have passed since the appearance of a walled settlement, which later grew into a castle guarding the borders of the land of the Zlicans and its main trade route, and even later it bloomed into a town, which, however, one-hundred-and-fifty years ago burned to the ground and was built anew in even more beautiful form, with strong walls that not even Kutna Hora or Prague need be ashamed of.
The fortified town of Rattay fell under the possession of the King, and was granted as a fiefdom, and during the reign of John of Luxembourg it fell under the rule of Lord of Henry of Lipa, who then had built a lower castle that they called Pirkstein. Today, Rattay is under the administration of Hanush until young Lord Capon of Lipa reaches adulthood and unto him shall be granted the whole town and its surrounding estates as a fiefdom.
In Rattay all manners of tradesmen flourish - butchers, smiths, tailors, weavers, and armourers - and great markets are held here every month. Rattay is an administrative centre and thus can afford to employ its own executioner and support a strong municipal garrison.Its large stone church is consecrated of Saint Mathew.
우리 장엄한 역사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보헤미아의 땅은 비옥하고 풍요로워 많은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아름다움과 풍족함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했다. 첫 번째 천년기가 끝나기 전에는 대모라비아 제국과 통합되지 않은 보헤미아 공국이 공존하였는데 후자는 프르셰미슬 가문이 통치했다. 이 땅의 수호성인인 성 바츨라프는 프르셰미슬[각주:1]가문 출생이며, 마찬가지로 프르셰미슬 성씨인 그의 동생 볼레슬라프 1세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 이 땅을 통일하였다. 그의 아들 볼레슬라프 2세는 프라하의 교회를 소교구에서 교구[각주:2]로 승격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보헤미아가 편입되었으나 프르셰미슬 가문의 어느 군주도 아직까지는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첫 번째로 왕의 칭호를 받은 이는 브라티스라프 2세로 그는 밀라노 공격 당시에 황제를 원호한 공을 인정받아 왕위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그러지 못했으며 훗날 오타카르 1세가 왕위를 쟁취해내기 전까지 왕의 신분이 아닌 공작의 신분으로 통치했다. 왕위를 얻은 오타카르 1세가 그 후에 모라비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겠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현명하고 평화롭게 그의 아들에게 모라비아 변경백위를 물려주었다. 모라비아 변경백령은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땅이 아니라 보헤미아 왕국에 속하는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프르셰미슬 왕조는 오래가지 못했고, 살인자의 손에 들린 칼에 위대한 왕조는 죽임을 당하고 빈 왕좌는 룩셈부르크 가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다른 여러 영토를 보헤미아 왕국에 병합하여 나라의 강역이 거의 북해에서 지중해까지 닿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가장 명명 높은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4세는 그 치세에 있어서 모든 영지에 큰 부와 풍족함을 누리게 해 보헤미아의 명성이 널리 퍼졌고, 프라하 교회를 주교구에서 대주교구로 승격시켰으며, 프라하 대학과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다리 및 새로운 거주구 건설을 지시했다. 프라하 대학은 많은 지식인을 배출하였으며, 프라하는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카를 4세의 장자 벤체슬라스 4세는 풍족함과 막대한 부를 누리는 땅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으나 그는 현명한 통치보다는 창녀와 음주에 더 전념했으며 주교들 사이의 관계를 가르고, 로마에도 등을 돌리게 했다. 그의 군주로서의 무능함은 극에 달하여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이복동생인 지기스문트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폐위했다.
주석: 여기에 벤체슬라스왕에 대해 적인 이야기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다. 지기스문트 그 여우 같은 놈은 창녀의 자식에, 이 땅의 배신자다! 벤체슬라스 왕이야말로 진정한 국왕이시다!
프르셰미슬 왕조(체코어: Dynastie Přemyslovců)는 9세기부터 1306년까지 이어진 보헤미아의 체코인 왕조이다. [본문으로]
가톨릭교회를 지역적으로 구분하는 한 단위. 주교(主敎)를 중심으로 하여 대주교구, 주교구 따위가 있다. [본문으로]
배우자: Elizabeth of Pomerania (1363년–1378년), Anna von Schweidnitz (1353년–1362년), 앤 오브 바바리아 (1349년–1353년), 블랑쉬 오브 발로이스 (1329년–1348년)
자녀:바츨라프 4세, 지기스문트, 안나 체스카 왕녀, 존 오브 괼리츠, Karel of Bohemia, Margaret of Bohemia, Queen of Hungary, Catherine of Bohemia, Václav Lucemburský, Elisabeth of Bohemia, Margaret of Bohemia, Burgravine of Nuremberg
부모: 얀, 엘리슈카 프르셰미슬로브나
- 룩셈부르크의 요한 왕의 아들이자 벤체슬라스를 낳은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 왕조에서 보헤미아의 왕(1346년-1378년)이 된 두 번째 사람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작위(1355년-1378년)를 얻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그에게는 모라비아의 변경백, 룩셈부르크의 공작, 이탈리아의 왕, 로마인들의 왕, 부르고뉴의 왕 등의 많은 작위가 있었다.
Charles IV of Luxembourg, born Wenceslas, son of King John of Luxembourg, was the second member of the Luxembourg dynasty to become King of Bohemia (1346 - 1378) and the first to attain the title Holy Roman Emperor (1355 - 1378). He held many other titles besides: Margrave of Moravia, Count of Luxembourg, King of Italy, King of the Romans and King of Burgundy.
그는 외교력과 박식함으로 명망이 높았고,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가문을 유럽, 특히 보헤미아[각주:1]와 모라비아[각주:2], 독일에서 몰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여러 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고 프랑스 궁중에서 다름 아닌 미래의 교황인 클레멘스 4세를 가르쳤다.
Renowned for his diplomatic skills and erudition, he actively endeavoured to consolidate his position and ensure the survival of his line in Europe, especially in Bohemia, Moravia and Germany. He was well-versed in several languages and at the French court he was tutored by none other than the future pope, Clement VI.
그의 재위 동안, 프라하와 보헤미아 왕국은 중대한 변혁을 겪었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재위 기간은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여러 훌륭한 건물들의 건설을 시작했고, 카를 대학, 카를 다리, 카를슈타인 성 등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을 사회에 널리 강조했다. 그는 성 벤체슬라스, 성 지기스문트, 성 비투스 신앙을 혁신하고 이 성인들을 많은 교회 건물에, 특히 프라하 대성당에 봉헌했다.
During his reign, Prague and the lands of the Bohemian Crown underwent a major transformation, becoming a powerful political, economic and cultural centre. For this reason, this period of his reign is known as the Golden Age. He initiated the construction of many superb edifices, which thus bear his name, including Charles University, Charles Bridge and Karlstein Castle. He was keen to emphasise the role of religious faith in society. He renewed the cults of St. Wenceslas, St. Sigismund and St. Vitus, consecrating various Church buildings to them, among others Prague Cathedral.
그는 네 번 결혼했고 열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유아일 때 죽었다. 그의 자식 중 가장 유명한 이들은 모두 보헤미아의 왕국의 지배자가 된 벤체슬라스와 지기스문트이다.
He married four times and had thirteen children, most of whom died in infancy. The most illustrious of his offspring were his sons Wenceslas and Sigismund, who both became rulers over the lands of the Bohemian Crown.
중부 유럽에 있었던 역사상의 국가. 현재는 체코의 서부에 해당하는 지방으로 엘베강의 상류 지역에 위치한다.[본문으로]
체코 동부에 있는 지방. 도나우강의 지류인 모라바강이 관류하고 있어 농업, 목축, 임업이 활발하며 북부는 석탄, 철강의 산지로 유명하다.[본문으로]
형제자매:지기스문트, 존 오브 괼리츠, Elisabeth of Bohemia, 안나 체스카 왕녀, Catherine of Bohemia(/Katharina von Luxemburg), Margaret of Bohemia(Queen of Hungary), Margaret of bohemia(Burgravine of nuremberg)
배우자: 소피아 오브 바바리아 (1389년–1419년), 조안나 오브 바바리아 (1370년–1386년)
부모: 카를 4세, Anna von Schweidnitz
- 보헤미아의 통치자이자 로마 제국의 전 황제. 하지만 많은 독설가가 그는 진정한 왕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의 이복형제 지기스문트의 편을 든다. 서기 1361년, 그는 황제 카를 4세와 그의 아내 슈바이트니츠의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장남의 권리로 그의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작 2살에 그는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으며, 15살에는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강력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는데, 선왕이 죽기도 전에 새로운 왕을 왕위에 앉히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으며, 어린 왕은 성인이 될 때까지 제대로 통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후일 왕이자 황제였던 카를이 죽고 나서 벤체슬라스는 정당하게 두 왕좌에 올랐다. 처음에는 잘 통치하는 듯했으나, 형편없는 고문관들과 어리석은 유럽 영토의 통치자들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곧 왕이 처음에 보였던 열의는 사라지고, 술과 사냥에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왕국의 새로운 통치자를 향한 불만은 커졌고, 벤체슬라스는 갈등을 조정하는 대신에, 그로부터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 사태를 해결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아비뇽에 그들만의 교황이 있던 프랑스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크라운도 받으러 가지 않았다. 또한 그는 모라비아의 변경백 영지의 분노를 사서 그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모라비아의 요프스트가 그를 가둬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그의 참된 통치에 대한 무관심은 심해져만 갔고, 많은 귀족이 항의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헝가리를 통치하고 있던 그의 다른 형제 지기스문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낫다고 여긴 귀족 연맹이 벤체슬라스를 왕위에서 끌어내기 위해 결성되었다. 벤체슬라스는 귀족들이 보내는 경고와 협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가 원하는대로 통치, 정확히는 유흥거리에 전념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귀족들이 인내심을 잃고 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영토의 통치를 맡겼던 지기스문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기스문트는 도와주지 않고 벤체슬라스의 성을 빼앗고 그를 가두었다. 지기스문트는 지배권뿐만 아니라 왕위 또한 차지했고, 왕국에 법과 질서가 회복되는 것에 기뻐한 일부 귀족들은 그를 환영했다. 오늘날, 적갈색 여우,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동안, 벤체슬라스 왕은 여전히 지기스문트의 포로로 잡혀있다.